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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고글 / 욥기에 대하여 / 출처: 개혁하는 교회 기독교 자료실
이름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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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에 대하여

욥기는 문학 장르상 어떤 특별한 형식으로 엄격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욥기는 지혜문학으로서 초기 이스라엘의 서사시적(敍事詩的) 역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서사시적 역사는 족장들의 이야기나 출애굽의 서사시적 역사, 그리고 다윗의 이야기나 룻의 이야기 등에서 뚜렷이 부각되어 나타납니다. 욥기는 서론(1:1~2:13)과 결론(42:7~17)은 산문체이고, 본론(3:1~42:6)은 시가체로 되어 있습니다.

욥기에는 강한 극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의 드라마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변사(辯士)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대를 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욥기는 극(劇)이 아니라 설화(說話)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욥기는 지혜와 드라마, 서정시, 그리고 비극의 요소를 갖춘 희극적(喜劇的) 설화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설화란 신화나 전설의 의미가 아니라, 전기적(傳奇的) 이야기란 뜻입니다.




주인공 욥은, 성경과 다른 문헌에서 유추해 볼 때(B.C 20세기경의 고대 문헌 야살의 책에도 등장) 역사적 실존 인물임이 분명합니다.(에스겔 14:14, 20, 야고보서 5:11)

그리고 그는 계절에 따라 성 안에 살기도 하고(욥기 29:7), 또 어떤 계절에는 양떼를 몰고 다니며 사는 반유목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욥기 1:13~19/ 31:8, 20, 31, 38~40)

욥은 고난에서 건짐 받은 후에도 1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욥기 42:16) 따라서 그는 175세를 산 아브라함(창세기 25:7,8)이나, 180세를 산 이삭과 같은(창세기 35:28, 29) 족장시대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욥이 가장(家長)으로서, 번제를 드린 사실은(욥기 1:5), 욥이 공식적인 제사장 제도가 시행된 모세 이전의 인물임을 보여 줍니다.



1. 욥에게 필요했던 화목제(和睦祭)




당시 욥이 드린 번제는(욥기 1:5), 순전히 그의 가족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화목제를 드리지 않은 것은, 그의 신앙의 결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목제란, 인간의 화목을 위해 멀고 가까운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불화한 관계를 화목으로 바꾸는 제사를 말합니다.(참고, 사무엘상 9:12~13)

실상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은 시내산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어온 제사입니다.(참고, 창세기 8:20, 출애굽기 20:24)




구약 제사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5대 제사 중1)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심적인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는 반드시 수컷 즉 흠없는 수소나, 흠 없는 수염소, 수양이나 산 비둘기, 집 비둘기 새끼를 잡아 희생 제물로 드렸는데, 이때 가죽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불에 태워 올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시게 했습니다.(레위기 1장)

이는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생명 전체를 드려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예표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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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의 제사법 정신은 신약시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승화 완성되었기에,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예배속에 그 정신은 엄연히 살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영(靈)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할(요한복음 4:24) 우리들은 이미 그 예배 정신을 구약의 5대 제사 정신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번제와 화목제는 위의 본문 내용 중에 열거함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소제(素祭, the meal offering)는 피없는 곡식 제사로서(레위기 2:1~13),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황과 소금을 섞어(누룩과 꿀은 넣지 않음) 단에 불사른 것은, 예표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무죄성과(고린도후서 5:21, 히브리서 4:15, 베드로전서 2:22) 그리스도의 순수한 충성을 상징한 바, 오늘날 우리 성도는 예배시 그리스도와 같은 순수한 충성심으로 하나님께 자기 성화의 열매를 겸손과 온유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참고, 빌립보서 2:17, 골로새서 1:29, 요한계시록 2:10/ 12:11)




․속죄제(贖罪祭, the sin offering)는(레위기 4:1~5:13)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예표하는데(참고, 고린도후서 5:21, 히브리서 9:12~14, 요한일서 1:7), 이는 선민이 알고 지은 죄(故犯罪, 고범죄)가 아닌, 부지중에 하나님 앞에 범한 죄를 깨닫고 신분과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짐승의 제물을 드림으로 죄 사람을 받았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부지중에 지은 죄를 예배시 낱낱이 회개하고 자백함으로 죄사함의 기쁨을 맛볼수 있다.




․속건제(贖愆祭, the trespass offering)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지은 죄값을 대신 지불해 주시는 대속사역을 예표한다.(레위기 5:14~6:7/ 7:1~7, 이사야 53:4~6, 골로새서 2:13~15) 특히 하나님의 성물 또는 이웃에게 부지중 과오를 범했을 경우, 희생제물 외에(언제나 흠없는 수양만 허락됨) 침해한 물건의 오분의 일(20%)에 해당하는 일정액의 손해배상을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제사였다. 이 속건제는 십계명 중 주로 대인(對人) 관계 계명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어겼을 경우에 속죄를 위해 벌과금과 함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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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화목제(和睦祭, the peace offering)는 흠없는 수소, 암소, 흠 없는 수양, 암양, 염소로 제사 드렸는데(레위기 3:1~17), 이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였습니다.

이때 희생 제물의 짐승의 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피를 상징했는데,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허물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것이요, 수평적으로는 인간 상호간에 가로막혀 있는 불신과 미움의 담을 허물어 진정한 친교와 사랑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히브리서 12:14)




여기서 ‘화평함’이란, 물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뤄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이며, 또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사이,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화평을 뜻합니다. 그리고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거룩해져만 하는 바,(참고, 레위기 11:45, 베드로전서 1:15,16) 이러한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은혜시대든 종말시대든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 욥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욥이 내내 자신의 순전성과 의로움에 대한 열변을 토하다가(욥기 31:40절까지), 그 후에 욥이 자신의 무지와 부끄러움을 깨닫고 더 이상 하나님께 말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으리라 하며(욥기 40:4,5), 비로소 하나님께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보일 때(욥기 42:1~6) 하나님께서도 욥의 고난을 돌이켜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기 42:7) 하시며, “너희는 수 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욥은 이때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습니다.(욥기 42:10) 뿐만 아니라 이날에야 욥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욥의 집에서 욥과 함께 식물을 먹으며 욥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화목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예배가 번제의 의미뿐 아니라, 화목제의 영적 의미도 반드시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2. 고난에 대한 욥기의 신학(神學)




욥기에는 고난에 대한 욥의 네 친구들의 견해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욥의 고난에 대한 네 친구들의 각기 다른 견해들이 주장되어 있고, 이에 대한 욥의 반론(反論)이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은 다같이 나름대로 훌륭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당초 욥을 찾아왔던 것은 그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친구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욥을 더욱 괴롭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세 친구들이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한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지적한 대로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기 12:2) 라고 말한 것이, 그 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적 단견(短見)과 편견들을 가지고 욥을 가차없이 정죄하여, 도리어 설상가상 격으로 욥에게 더욱 잔인한 고통만 끼쳐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개의 언쟁이나 싸움은 내 생각만 옳다는 주장에서 비롯됩니다. 그럼 욥의 세 친두들의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엘리바스의 주장

욥과 친구들의 첫 번째 논쟁(4장~14장)에서 엘리바스는 욥의 특수한 상황은 고려치 않고, 자신의 오랜 경험에 입각하여 ‘회개’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욥기 5:8~27)

그리하여 욥기 4장에는 엘리바스의 상담가적이고 교육자적인 훈계가 두드러진 특징으로 암시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엘리바스가 욥의 회개를 요구하는 심정에서 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원리나 원칙만을 지나치게 강조, 적용한 까닭에 욥에게는 더욱 큰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엘리바스의 충고에는 당시 만연해 있던 인과 응보 사상과 지혜 문학의 영향이 담겨져 있습니다.2) 그리고 이러한 인과 응보 사상과 지혜 문학의 영향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적용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바, 욥기 저자는 이와 같은 엘리바스의 훈계 속에서 당시 성행했던 사상의 내용과, 또한 그에 대해 반동하는 욥의 반론(욥기 6:1~7:21)을 기술 함으로써, 진실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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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욥기와 잠언의 지혜 문학적 특징 비교.

구약 성경에서 지혜 문학에 속하는 잠언은 보수적이며 실용주의적이고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잠언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느낀 하나님께 대한 공통적인 사항들에서 생활의 일반적인 진리를 찾아냄으로 사람들이 평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교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지식의 소유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인간들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하였다. 또한 고난과 불공평의 변칙적인 사태들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추구와 모색은 욥기의 저자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 사상을 탐구하도록 이끌어 갔다. 욥기 저자에게는 지혜가 더 이상 단순히 총명하고 반성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욥기에서는 지혜가 창조의 능력, 신(神)의 질서,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한계라는 구조적 양식 속에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잠언과 욥기에 나타난 주요 문학적인 양식들은 ①속담이나 격언, 수사학적인 질문, ②경고적인 짧은 교훈과 긴 강연으로 확장된 교훈, ③독백과 논증, 그리고 설명적인 이야기체 등이다.

이러한 지혜 문학서들이 추구한 목적은 도덕적인 규칙들을 제시함으로써 생활의 안내를 하는 것이며 또한 사색과 반성, 그리고 토론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었다. 즉, 지혜서들은 정신과 양심을 개발함으로써 질서의 구조와 의미, 그리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욥기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의 깊은 심연을 탐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엄하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인간의 난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그 의미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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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엘리바스는, 고난은 범죄에서 온 것으로 인간 자신의 책임이며 범죄의 결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가운데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기 4:7~9)




엘리바스는 또한 다음과 같은 논조를 통해 욥의 완악한 고집을 드러내고자 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기 5:8)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엘리바스의 주장에서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위로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신앙 논리만을 고집하는 자의 대표적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신약 시대에 다수의 대중을 멸시하고, 자신들의 규칙과 교리만을 행위적인 습관으로 강조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방불케 합니다.(마태복음 9:10,11, 누가복음 15:1,2)

이처럼 엘리바스는 욥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나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때문에, 그의 논지와 논리는 비록 타당하다 할지라도 그의 가정은 틀린 것입니다. 사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잘못된 가정을 지나치게 정당화시켜 놓고, 자신의 주장을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생각과 주장들이 그 자체의 내용으로는 문제가 없겠으나, 그것을 어떤 상황에 적용시켰을 때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惹起)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언제나 정확한 상황 판단과 그에 대한 바른 진단을 통해 적절한 조처를 취함으로 타인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둘째, 욥의 반론(反論)

욥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엘리바스의 주장이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행위를 아무리 성찰해 보아도, 엘리바스의 말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원인적 잘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16장 17~22절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예컨대 엘리바스가 자신을 포학하고 강포한 자라고 취급했으나(욥기 15:20) 사실 욥은 자신의 손에 포학이 없음을 양심에 따라 증거했습니다. 이를테면 타인의 재물을 강탈하거나 불의하게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음을, 그의 양심이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께도 결백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가진 믿음이 위선이라고 비난했지만(욥기 15:4~6) 욥은 자신의 기도가 정결하기 때문에(욥기 16:17) 하나님께 결백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자기 자신의 난제(難題)에 대해서 변론을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의(義), 즉 자신의 의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기 전반부 6장 14~16절에서 욥은 친구들의 무정함에 대해서 역설(力說)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변론을 끝내지 아니하고, 엘리바스의 충고에 헛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냈습니다.(욥기 6:29)(참고, 욥기 27:6) 욥은 자기 변론의 차원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강조하는 자는, 마치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도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누가복음 18:9~14) 예수께서는 그러한 자를 엄하게 질책하신 바 있으며, 욥기 6장 24~30절에서의 욥의 그러한 과오 또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호되게 질타를 당하게 됩니다.(욥기 40:6에서부터 41:34)

뿐만 아니라 욥은 자신의 유일한 변론자로 나서야 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행위를, 친구들의 정죄에 대한 암묵적 동의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방관자적인 자세로 욥의 정죄당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욥은 16장에서 하나님을 자신에 대한 변호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정죄하여 마침내는 죽음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극악한 고소자로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무죄를 변호해 줄 만한 인격적 대상이 없어졌다는 절대 절망의 슬픔 때문에 낙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참고, 욥기 16:16)




사실 욥의 이러한 고통 같은 고난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유대인,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 당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27:27~44)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하나님은 결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외면했던 것이 아님 같이(마태복음 27:50~54, 빌립보서 2:6~11), 욥이 그토록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기록되어 있는 욥기 42장에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욥과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인격적인 판결을 내리시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욥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으셨다는 결론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도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환난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셋째, 빌닷의 주장

빌닷 역시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흑백 논리로, 욥이 죄인임을 주장했습니다.(욥기 8:1~22)

따라서 욥기 제 8장에는 전통적인 옛 교리에 대한 빌닷의 확고한 신념이 도식적이고 냉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9장에는 욥의 두 번째 대답으로써 상대적 가치 기준에 따라 모든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는 논리를 반박하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 악인임을 강조함으로, 빌닷과 엘리바스의 논리에 항거하는 욥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욥은 빌닷의 변론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가하고 있는 바, 이를 세부적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욥기 26장)




1) 빌닷의 변론은 욥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26:2) 사실 빌닷을 비롯한 욥의 친구들은 욥이 처한 재난을 도울 생각으로 나름대로의 변론을 펼쳤으나, 그들은 오히려 ‘번뇌케 하는 안위자’(욥기 16:2)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사상에 기초해 말함으로 그 변론 자체로는 진리를 얘기하는 듯 했으나,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결국은 사랑과 위로의 마음이 결여된 허공을 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당한 욥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죄를 질책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잡도록 격려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빌닷의 변론에는 참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26:3) 빌닷의 진술은 욥의 상황에 적절치 못한, 적용과 진리의 외형적 사실만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지혜 없다고 비난하던 욥의 이해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욥기 25:2~6)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욥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이 음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으며(26:6), 뒷 부분에 나오는 지혜를 찬양하는 시(詩)에서는, 참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8:23~28)

결국 욥은 이러한 사상으로 자신의 고난을 보고 있었기에, 친구들의 인간 이성에 입각한 지혜에 대한 변론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 빌닷의 변론과 욥의 주장과는 하등의 접촉점이 없었습니다.(26:4) 사실 앞에서 욥이 주장했던 이론은, 악인을 세상에 놓아두시고 그 악행을 묵과하시는 듯한 하나님의 섭리가 모순이라는 것이었습니다.(24장) 그러나 빌닷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비해 깨끗치 않은 인간이라는 비교적인 관점을 통해, 욥이 죄인이라는 간접적인 주장을 폈습니다.(25장) 그러기에 욥은 26장을 통해 논점을 벗어난 빌닷의 변론에 대해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욥은 빌닷이 자신의 논지가 없이, 엘리바스에게서 빌어온 이론을 이용해(욥기 4:17~19) 변론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공박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빌닷의 변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일일이 예를 들어 반어법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는 욥기 26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교훈을 제공해 줍니다. 즉, ①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돕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잘 이해하고 위로하여,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고린도후서 1:8~10)과 ②성도는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이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만한 것인지를 깊이 살핀 후 말해야 한다.(잠언 15:28, 고린도전서 14:19)는 사실입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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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올바른 말의 능력.

“사상이 구체화 된 것이 곧 언어이다”라고 워어즈 워드(William Words worth)가 말했듯이,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정리하게 하며 가다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고 간결하며 또한 우아하게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할 때 언어의 능력은 발전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욥의 친구들이 조언은 욥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욥을 격분하게 했다.(욥기 6:24~30) 그러기에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능력있는 말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게 한다.

예컨대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말에는 능력이 있게 마련이다.(마태복음 13:54, 마가복음 6:2, 고린도전서 2:1,2,4,5) 욥의 친구들의 말이 정당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온전히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참고, 에스겔 28:17, 고린도전서2:8)




그러므로 성도들은 올바른 말과 그릇된 말의 차이점을 확실히 깨달을 필요가 있는 바, 이는 다음과 같다. ①정직한 말로 인해서 가끔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올바른 말의 진가는 밝혀지게 된다. 옳은 말은 악인을 깨우쳐 구원할 수 있게 하고(에스겔 3:17~19)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며(이사야 50:4) 즐거움을 주게 된다.(잠언 16:24) 그러나 ②그릇된 말은 암과 같이 자신과 남들을 멸망으로 이끈다. 그래서 악인은 거짓과 아첨을 할 뿐만 아니라(시편 12:2~4) 유혹하고(잠언 7:21) 하나님을 훼방하며(이사야 37:4,6,17, 계시록 13:6) 남을 해할 음모를 꾸며(잠언 12:6) 죄를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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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소발의 주장

앞에서 소발과 다른 친구들은 악인이 멸망당한다는 사상에 입각해, 욥에게 내려진 재앙을 그의 범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욥기 4:7~9/ 8:4)

특히 소발은 한 술 더 떠서, 욥의 고난이 그의 죄보다는 가볍다고 했습니다.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主)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기 11:4~6)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이 반드시 악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다른 섭리 가운데서 고난을 주실 수도 있다는 논지를 펼칩니다.

즉 욥의 친구들은 인과 응보라는 사상에 입각해, 악인이 벌 받고 의인이 상 받는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였지만, 욥은 현재 당면한 고난이 반드시 범죄에 대한 징벌만은 아니라고 현실의 예를 들어 반박했습니다.

예컨대 욥이 12장 6절에서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라고 탄식한 것이 그 단적인 모습입니다.




사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기 전편에서 누누이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재난을 당한다’는, 지극히 피상적인 논리로 욥의 태도를 연이어 공박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가 원칙적인 입장에서는 옳을 지 모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선한 사람이 연거푸 몰락을 겪는가 하면, 온갖 계교와 간지(奸智)를 다 부려 종횡무진(縱橫無盡) 악을 이용해 활개치는 자가 도리어 형통하는 일이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하박국 1:13) 따지고 보면 세상은 악한 계교를 가지고 날뛰는 자가, 더욱 형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구조부터가 악의 온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욥의 반론

소발은 욥기 20장에서 사악한 자의 즐거움이 신속히 날아가고(20:5), 건강하던 몸이 불원간에 죽어버린다(20: 11)는 논지를 제시하여, 악인이 재앙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소발의 변론을 오히려 악인이 자손과 함께 번영한다는 반대의 논지로 일축해 버렸습니다.(욥기 21:7~13) 그 뿐만 아니라 욥은 악인의 빛이 어두워지고 그 등불이 꺼진다는 빌닷의 주장도(욥기 18:5,6), 결코 사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오히려 폭풍과 바람 앞에서까지 안전한 것이 현실이라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욥기 21:17,18)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욥은 친구들의 논박 사항을 하나씩 지적해 가면서, 거기에 대해 아주 조직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비록 원망 섞인 것이긴 하지만, 특히 욥은 21장에서 악인이 단명(短命)하고 즉시 멸망한다는 소발의 진술에 대해(욥기 20:11,28) 정면으로 반박하는 변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상 악인이 현세에서 재물을 모으지 못하고 일찍 단명한다는 이론은, 엘리바스 역시 자신의 두 번째 변론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욥기 15:29,32~34) 그러므로 욥기 21장에서 욥은, 소발에게 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의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욥이 21장에서 친구들의 인과 응보 논리를 공격하기 위해, 욥이 사용하는 이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악인도 세상에서 장수하고 득세한다는 것입니다.(욥기 21:7)

이는 악인이 강장(强壯)한 기세를 채 떨쳐 보기도 전에, 멸망한다는 소발의 주장(욥기 20:11)에 대한 반박입니다. 성경에는 특별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잠언 10:27)4), 부모를 공경하는 자(신명기 5:16, 에베소서 6:1~3), 참 지혜를 소유한 자(잠언 9:11) 등이 세상에서 장수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현실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자도, 장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이러한 현실의 경험을 예로 들어, 기계적 응보론을 주장한 친구들에게 반박한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변론 속에는 의인이라도 꼭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 암시적으로 강조되어 있어, 결국 자신의 현재적 고난을 범죄와는 별개의 문제로 밝히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2) 악인의 자손도 번창하고 재산이 증식된다는 것입니다.(욥기 21:8~10)

사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자손이 번성하고 우양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신명기 28:4, 시편 144:12~15),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영원하신 구속 계획을 알리시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사적 맥락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했던 욥의 친구들은, 경건한 자에게 반드시 현실적 축복이 내려져야만 한다는 인과 응보적 논리만을 고집하였습니다. 때문에 욥은 악인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 현실적 체험을 바탕으로, 친구들의 논지를 일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어느 시대 어느 때라도 있어 왔는데, 욥은 이러한 주장을 통해 자신의 자식이나 재산의 상실이 결코, 자신의 범죄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악인들은 패역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욥기 21:14,15)

욥은 악인이 번성하는 현실을 먼저 제시한 후(욥기 21:7~13), 그들의 생각이 몹시 불경건함을 말합니다. 이는 욥이 자신의 논지를 전개시키는 특성의 하나로서, 악인들의 생각과 의식이 이렇게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악인의 번영이 그들의 선한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닌 것처럼, 욥 자신의 고난 또한 악한 범죄로 인한 응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엘리후의 등장(욥기 32장)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의 세 친구와 3차에 걸친 변론(4장~27장)에 이어서, 이제 ‘지혜에 관한 시(詩)’로(28장) 마지막 답변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독백을 통하여 고난 이전의 축복된 삶을 회상하고(29장),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대비시키며(30장), 최후로 자신의 무죄함과 결백을 법정 증언 형식을 통하여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31장)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32장에서는 지금까지 전혀 소개가 없었던 젊은이 엘리후의5) 새로운 등장으로, 욥기 전체의 구조와 내용의 대전환을 맞게 됩니다. 예컨대, 32장을 통해 형식상으로는 욥기 전체의 극적(劇的) 절정(climax)을 이룸과 동시에, 내용상으로는 현재까지의 욥의 고난에 대한 원인을 인과 응보의 논리에서 고난을 통한 연단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환된 주제와 형식을 갖는 엘리후의 본격적인 변론은(욥기 33장~37장) 이제 논리적인 면에서 인과 응보가 아닌, 고난을 통한 연단이라는 견해로 고난에 대한 새로운 적극적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32장은 욥기 전체의 내용에서 볼 때 극적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즉, 경험론적이고 유전적으로 내려온 인간의 지혜와 통찰은, 결코 신적(神的) 지혜와 섭리를 포괄할 수 있는 절대 진리일 수 없으며,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탁월하신 지혜 아래에 위치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경험 세계와 사고(思考)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 섭리로의 대전환을 이루는, 문학 형식상의 절정의 단계를 이룹니다.




일곱째, 엘리후의 변론

엘리후의 변론은 구체적으로 모두 4차례에 걸쳐 이뤄지는데(욥기 33:1~33/ 34:1~37/ 35:1~16/ 36:1~37:24) 엘리후는 욥이 자기 의(義)를 주장한 사실(욥기 13:23~27/ 16:17)을 공박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사랑의 목적으로 고난을 주신다는 것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즉 엘리후는 그의 변론을 통해 고난은 순결한 인격을 소유케 하며,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여 더 이상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허락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엘리후의 변론은, 욥의 고난을 무조건 범죄의 결과(욥기 4:7,8)로 인정해 단순한 인간의 경험, 연륜, 학식에서 나온 인과 응보 논리로, 욥을 정죄했던 세 친구들의 변론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욥기 32:8)로, 고난의 의미를 보다 한차원 높은 ‘연단’으로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후의 견해는 어떤 면에서, 욥이 기대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판결자’(욥기 9:33)로 자처하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기 이해에도 불구하고, 엘리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또는 전적으로 대변하지 못했습니다. 이유인즉, 진정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결국 하나님 스스로 밝히셨기 때문입니다.(욥기 38장 1절에서 41장 34절까지)


여덟째, 침묵을 깨신 하나님의 말씀(욥기 38장)

엘리바스-욥, 빌닷-욥, 소발-욥의 순서로 계속되었던 논쟁은 세 번의 주기(4장~27장)를 거쳤지만,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문제의 해결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등장하여 해결에 관한 기대를 갖게 하는듯 했으나, 역시 앞서 벌어졌던 논쟁을 전환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자(33장~37장), 오랜 침묵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께서 마지막 변론자로 등장하십니다.

따라서 욥기 38장은 침묵을 깨뜨리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시작되는, 욥기 전체의 대단원(38장1절에서 42장6절)을 구성하는 첫장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서 욥기의 최종적 결론의 서두인 38장은, 위대한 창조 사역을 행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그 무한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를 대비시키면서 출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38장에 나타난 내용적인 특성과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책망(38:1~3): 하나님의 책망은 고난이 부당하다고 호소하는 욥에게(욥기 13:3,22/ 23:3~9), 폭풍 가운데 말씀하심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폭풍 중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또한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폭풍, 혹은 회오리바람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에,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성경에 그 예가 많이 있습니다.(욥기 38:1, 시편 18:9~13, 에스겔 1:3~21, 스가랴 9:14등)




사실 그동안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상투적으로 인과 응보식의 논리로, 욥 자신의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만 단정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결론없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顯現)하시어 욥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요구에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반어법을 사용하셔서 욥에게 오히려 질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욥의 요구가 이치를 어둡게 하는 어리석은 일이며(38:2), 고난은 당신의 백성을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다루심 일진데, 이 계획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하며 인간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것은 무지한 소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피조된 자연계에 대한 질문(38:4~41):하나님께서는 별자리에서 진흙, 금수로부터 새들에 이르는 주제를 통해 욥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주와 하늘과 땅 위에 장엄하게 펼쳐진 창조의 기묘함은 오히려 욥을 겸손케 하고(욥기 40:3~5), 나름대로의 논리와 이론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던 욥을 회개케 합니다.(욥기 42:1~6)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미물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계획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써 자신이 가장 귀하게 창조한 인간을 다루시는 데 있어, 결코 기계론적인 도식적(圖式的) 논리나 우연이나 무질서로 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욥기의 후반부에 와서야 욥에게 답변하시는 하나님은, 욥과 친구들이 제기한 질문들과는 거리가 먼 듯한 답변을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선 왜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고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입장들이 있지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욥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실한 답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의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간접적인 대답을 통해, 그 난제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신축성 있는 답변을 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욥이 고민하는 문제를 우회적(迂廻的)으로 표현하여, 욥이 스스로 지혜의 길을 걸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욥기 38장에 제시된 창조 기사는,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말씀에 의한 창조를 강조하고 있다면(창세기 1:1), 38장에 나타난 창조는 지혜에 의한 창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4~7절) 참으로 말씀과 지혜는 창조의 근본 원리 입니다.(창세기 1:3) 만일 창세기 기사만이 창조의 증거였다면, 욥기서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하시고 섬세하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장엄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근본 구조와 원리까지 파악하시는 지혜로우신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8장은 성경에서 가장 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적은 대목으로 수려한 시적(詩的) 탁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본장에 등장하는 시들은 히브리시의 특징인 병행적 시작법(詩作法)에 따라 이루어진 바, 이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기록한 시편 24편과 내용상 유사하나, 욥기 38장에 나타난 것처럼 ‘질문 제기’ 형태를 띤 시의 형식은, 시편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시작법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용을 지닌 38장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상하신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비록 인간이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주장할지라도, 무한한 하나님의 계획(욥기 38:4~41)과 견주어 볼 땐 너무나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인간의 요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응답하시고(38:1), 그 이상으로 답변하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성숙시키시는 진정 신실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아홉째, 욥의 회복(42장)

욥기 전체의 결론을 구성하고 있는 42장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욥이 회개함으로써, 극적인 대전환을 이루고 있는 대목입니다. 즉, 욥기 전체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에 의한 욥의 순응 결과를 담고 있는 42장은 욥의 회개(1~6절), 욥의 도고(禱告, 7~9절) 그리고 욥의 회복(10~17절)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욥기의 저자가 본서를 행복으로 결말짓고 있는 것은 문학의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의도에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욥기의 저자는 42장의 구조를 볼 때 욥의 응답까지만을 시(詩)로 기록하고, 친구들을 위한 도고(禱告)부분부터는 산문으로 쓰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처럼 욥의 두 번째 응답을 시로 구성함으로써, 욥과 하나님과의 변론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욥과의 변론은 하나님의 말씀(욥기 38:1~40:2)과 욥의 응답(욥기 40:3~5),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욥기 40:1~41:34)과 욥의 두 번째 응답(욥기 42:1~6)이라는 시적 대구를 써서 구성한 데 반해, 친구들에게 하신 말씀은 산문으로 구성하여 욥에 비해 친구들의 비중을 가볍게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욥기에 자주 나타나는 이와같은 대구법(對句法) 또는 대조 병행적 문학 구조는 히브리 문학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로, 특히 같은 지혜 문학에 속하는 잠언과 시편에도 자주 등장하는 수사법입니다. 지혜 문학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문학적 기법을 도입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강조된 부분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럼 욥기 42장이 강조하는 핵심과 그 의미의 특성을 살펴보겠습니다.

1)욥의 회개(1~6절): 4장에 걸친(38장~41장)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드디어 욥은 자신의 미천함과 스스로 무지한 말을 많이 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교만을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통해 욥은 만물이 하나님의 다루심 아래 있다는 사실과, 그 만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즉,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기 38:2)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다’(욥기 42:3)고 참회합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귀로만 주의 말씀을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본다’(욥기 42:5)는6) 고백을 통해 더욱 분명한 회개의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의 논리로 판단할 때는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니, 지금까지 자신의 오만한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친구들을 위한 욥의 도고(禱告, 7~9절): 그 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도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에 대해 최종적 판결을 내리십니다. 이 판결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내 종 욥처럼 정당하지 못하다는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동안 37장에 이르기까지 장황하게 설명되어진 내용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정당(正當)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엘리바스는 영적(靈的) 현상에 관한 주관적 체험으로(욥기 4:12~21), 빌닷은 전통적인 견해로(욥기 8:8~10), 그리고 소발은 자기 나름의 확신으로 욥을 정죄하였습니다.(욥기 11:11~20) 욥의 친구들의 이와 같은 논리는 개별적 의미에서 볼 때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이 개별성을 보편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제한해 버리는 우(愚)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엘리바스를 대하여,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7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처음부터 욥을 향해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기 4:7). 라고 함으로써, 다같이 철저한 교리주의자들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자기의 어떤 교리적 관점에만 지나치게 매달려 있는 신학자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교리(敎理)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관을 정립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리는 분명히, 우리의 신앙 생활에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리 한 가지만을 절대시하여, 세상 일 모든 것을 다루려 한다면, 그것은 큰 과오(過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교리로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크고 넓고 깊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를 중요시하되, 욥의 세 친구들 같은 우(愚)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엘리바스와 두 친구에 대하여 진노하시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에게 욥을 중보자로 하는 번제를 요구합니다. 사실 욥을 중보자로 세우는 이러한 일은 이전에 중보자를 요구했던 욥을 생각할 때(욥기 9:32~35/ 16:19~21) 참으로 굉장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간 욥을 중보자로7) 세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회복하게 하심으로써 그를 진정한 회개자로 이끌고 나가십니다.




3) 하나님의 축복(10~17절): 하나님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후, 하나님께서는 노년의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잃었던 재산에 대해 갑절의 축복을 배려신 것입니다. 이렇게 배려를 하신 것은, 욥이 평소 바른 물질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욥기 1:21) 또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잃은 자녀들을 다시 허락하시는데, 10명의 자녀를 그대로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내용은 욥의 딸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욥기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족장 시대라고 생각할 때, 딸에게는 오라비가 없을 경우에만 산업이 주어지는 관례(민수기 27:8)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에는 아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딸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이는 고난

이후 욥에게 베풀어진 축복이 딸에게까지 분깃을 줄 만큼 크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장수의 복까지 받아 손자 4대까지 보게됩니다. 이처럼 저자는 욥이 고난 이후 가장 큰 축복의 사람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재산, 자녀, 수명 등에서 누린 축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8)

특히 극도의 불행 가운데서 죽기를 소망한(욥기 3:1~26) 욥에게 하나님께서 장수의 복을 허락하심으로써(욥기 42:16),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다시금 욥기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욥기의 저자는 38장부터 진행된 하나님 말씀을 강한 특징을 지닌 시체(詩體)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본문은(7~17절) 잔잔한 산문의 필체로 진행시켜 차분히 본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요컨대 욥기의 결말(에필로그)을 구성하는 42장은 1절부터 6절까지는 시체(詩體)를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의 판결과 욥의 회복 부분(7~17절)은 서론처럼 산문 형식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처음과 나중이 산문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부분은 시가(詩歌)형식으로 되어진 욥기의 문학적인 양식의 혼용을 통해, 욥기 저자는 본서의 내용을 훨씬 박진감 있고 보다 더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본서의 결말은, 욥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로 마감함으로써, 서론에서 제기 되었던 사탄의 시험(욥기 1:6~12)에 정면으로 배치되게 구성함으로써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난 속에 욥이 거했으나, 이 고난 조차 하나님의 주권 속에 진행되었고(욥기 1:12), 고난의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고난의 과정도, 그리고 고난의 끝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욥기의 주제(主題)는 무엇인가?




욥기의 주제에 대한 가장 좋은 접근 방법은, 이야기 내용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진술한 다음, 그 문제에 답하는 과정을 따르는 귀납법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욥기 내용에는 크게 네 가지의 주제를 선정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의인이 어째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처음부터 욥은 순전하고(허물이 없음) 정직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지역에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계시가 충족히 발전되지 않은 먼 족장시대 초기에 생존했던 욥을 생각할 때, 욥의 신앙은 참으로 훌륭한 것으로 칭찬 받을만 합니다.




그런데 욥의 신앙과 의로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제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나타나고 확증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믿어집니다.

특히 욥의 네 번째 친구 엘리후는,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죄에 대한 징계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욱 더 축복의 길로, 참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는 연단의 의미로 풀이했습니다.(욥기 33:29, 30) 이렇듯 욥의 고난을, 더 큰 축복과 구원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계획된 훈련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엘리후의 해석은, 신약의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과 뜻을 같이 합니다.(베드로전서 1:3~7) 즉, 성도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잠시 고난을 받지만,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받을 칭찬과 영광을 염두에 두면, 오히려 금보다도 더 귀한 신앙의 훈련이며 연단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욥에게서도 보다 더 정금 같은 신앙을 바라시고, 하나님께서는 잠시 욥에게 사단을 붙이셨으며, 아울러 어려운 환경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을지라도, 그 의를 실지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또는 행함적으로 나타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히 말일에 쓰임 받을 종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게 되어야 하는데(참고, 야고보서 2:21~24),9)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완전한 의인의 신앙으로 만들어주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게 하고(예레미야 4:4) 또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 즉 ‘십자가 법’과 ‘예언의 법’을 기록하여, 뒤로 물러가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십니다. (참고, 히브리서 8:10/ 10:11,38)




한 예로, 말일에 영원한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종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단계인 젖을 먹는 차원의 세계에서는(히브리서 5:12,13)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갈등이 일어나서 결국 여호와의 신령한 말씀이 있는 곳으로 찾아나서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아모스 8:11~13)




둘째, 성도는 물질적 유형의 축복이 없이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욥은 사단의 시험에 의해 단 하루만에 전 재산과 열 자녀를 잃고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욥기 1:13~19) 또 얼마 후에는 온 몸이 썩어가는 지독한 질병에 걸려 신음했습니다.(욥기 2:7~10)

예컨대 욥은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위치에서, 하루 아침에 경멸과 모욕을 당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친구들과 아내에게서 조차 멸시 받고 소외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욥기 2:9/ 16:10/ 19:13~19)10)




그렇지만 욥은 다음과 같은 신앙의 자세를 가짐으로써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을 이겨냅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의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축복을 주신 자도, 또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자도 동일한 하나님으로 자각했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의 신앙을 승화, 성장시키려는 섭리(계획)를 갖고 계심을 욥이 어느정도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욥은 재산을 몽땅 잃은 재난 중에서도 영적 평정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사단의 1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사단은 여호와께 중상 모략하기를, 욥이 그 소유물을 상실하면 반드시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公言)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신앙은 세속적 번영이나 본분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누가복음 12:15) 신앙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때문에 욥이 모든 고난을 다 이기고 하나님께 신원받는 날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게 된 것도(욥기 42:10), 사실 욥의 이러한 올바른 물질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선하신가? 의로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세 번째는 소위 신정론(神正論)으로서, 세상에서 악인은 뻔뻔스럽게도 잘 살아가는데, 의인은 왜 도리어 헐벗고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회의심(懷疑心)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손상시키며,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속성을 모독할 수 있기에 바른 신관(神觀)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컨대 욥의 혹독한 시련은 사단의 악한 참소를 하나님이 받아주심으로써 시작되고 있어, 혹 성도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악한 행동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요한계시록 20:10), 자기의 운명대로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며 자기의 죄를 채워가는 타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단의 악한 계교를 잠시 허락하기는 했어도, 사단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은 사단의 계교를 역이용하여(선한쪽으로)욥에게 더욱 심오한 영적 통찰력을 갖게 하셨습니다.

자칫 사단의 존재가 욥기 1:6~8절에서 볼 때,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세상을 감찰하는 임무를 띤 존재인 것처럼 비칠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섰을 때 사단도 그들 ‘가운데’(ב, 바:불의의 침입자란 뜻)왔다고 한 것은, ‘가운데’란 전치사가 의미하는대로 그곳에 몰래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사단은 교만하여 타락한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땅으로 내쫓김 당한 불의한 천사로서(에스겔 28:13~19), 늘 안정이 없고 분요하며 목적없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운명을 짊어진 악한 존재입니다.(참고, 베드로전서 5:8,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악을 창출(創出)하거나, 또는 악을 저지르도록 원인을 제공하거나, 악을 이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설령 택한 자를 잠시 고생을 시킬지라도 그것은 축복을 주시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本心)이 아니시로다”(예레미야 애가 3:32, 33)




따라서 욥의 고통은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성을 깨닫지 못한 교만의 결과라는 친구들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시련과 역경을 통해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셨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이론적 신앙에서, 나아가 직접 눈으로 뵙는 것처럼 가까이서 주를 알도록 하셨습니다.(욥기 42:5) 뿐만 아니라 확고부동한 부활 신앙까지도 소유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욥기 19:25~27) 요컨대 욥에겐 고난이 축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에서 제기되는 신정론(神正論)의 바른 결론입니다.




넷째, 주제로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전적 순종은 가능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욥은 평소 그 누구 못지 않게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음에도, 하루 아침에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혹독한 고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어떠한 처지에 놓일지라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보였고 또 그렇게 성숙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욥의 신앙은 욥기 전체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욥은 고난을 통해 그 영혼은 더욱 흠 없게 순결해지고, 믿음은 더욱 정금 같이 단련되어(욥기 23:10~14),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 속에서의 인간의 절대적 순종․욥기의 이 주제야말로 세계 문학사(文學史) 중에서도, 걸작중의 걸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이라고 하는 당대의 한 경건한 인물의 깊은 체험적 삶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운 계시의 한 부분을 전달해 주시고자, 욥기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한 인물의 생애가 장엄한 서사시(敍事詩)로 표현되었다는 그 문학적 가치와 더불어, 그 이면에 숨겨진 신령한 영적 의미를 찾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성경문학이 기록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2014-10-31 15: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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