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제목  참고, 7장 후반부와 연관해서 (감성,영성 신학)
이름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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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영성에 대한 문제 제기 :
김정훈(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교 재학)


1.들어가는 말

드디어 기독교가 한국의 제일 종교로 자리잡았다(인구수에서)는 소식을 들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회심한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개신교)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많이 기도하는 편이다. 사실 우리 나라처럼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교회성장 운동에 관한 책이 기독교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고 실제로 교회에서는 귀찮다 싶을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사람을 끌어 모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리 착찹함을 감출 수 없을까? 모임마다 ‘부흥’이라는 곡이 불려지고 있지만 그것은 영적 빈곤이라는 시대적 콤플렉스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부흥 신드롬’은 아닌가? 문제는 부흥을 말하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부흥을 진정 경험했는가 혹은 하고 있는가에 관한 정직하고 심각한 진단을 교회나 교인 스스로 내리지 않는다는데 있다. 일단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항상 뭔가에 가려져 있는 듯 하다. 개인과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가 바로 서 있다면 문제는 다 풀리게 되어 있는가? 혹은 개인적 관계와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월하다는 관계 신학을(-relational theology :만일 개인적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을 성경이 요구한다면 그 경우에 성경은 타협되어야 한다는 주장) 무의식적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는가? 등등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지만 정말 피할래야 피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소위 성경적 신앙(말씀과 기도를 강조하는)을 자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 구조와 가치관에는 거의,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독교 신앙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문화는커녕 기독교 스스로의 생활이나 문화에도 거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예를 들어, 낙태나 지역감정 등의 문제에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별 차이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을 맛보지 못한 일본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0.8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기독인들의 영향력은 일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일본에 선교사를 그렇게 많이 파송하면서도 항상 이 부분에서는 뭔가 찜찜함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부흥이 일어났거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면 문화나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왜 그토록 미약한지, 왜 이러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는지 따져봐야 한다. 실제적인 부흥과 개혁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심각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한다. 개혁이 결여된 부흥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수박 겉핥기식의 날조된 체험일 수도 있다.
요즈음 교회의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에 속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고민을 갖고 있다고 한다. 왜 나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삶이 변하지 않을까? 왜 평일과 주일의 삶이 다를까? 왜 나는 수련회 다녀온 후 3일을 가지 못하는가? 왜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가? 나는 왜 이럴까? 이러면서도 교회에 계속 다닌다. 예수님을 믿는다기 보다는 그냥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고민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다른 대안을 가지고 살지만 결국 문제의 핵심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가?’라는 네 가지 꾸며낸 이야기를 먼저 생각해 보자. 부디 이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꾸며낸 이야기1- 충만하다고 느낄 대에는 뭐든지 다 헌신하려 들지만 자신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흥미가 없다. 소위 말하는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이 나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충만함을 원할수록 난 더 쎄게 기도한다.!!!

꾸며낸 이야기2- 교회 안에서 나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나의 모습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다. 용어와 표정관리만 제대로 하면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상사람들과도 교제를 해야하는데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 않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으면 더 좋겠지만 일단 내 영혼이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고 믿는다. 관습과 주변의 세계관에 적응한다는 것이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스트레스 중에 하나가 아닌가?

꾸며낸 이야기3- 이만큼 전도하고 이만큼 말씀을 읽고 이만큼 기도하면 충분히 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독교 냄새가 나는 모임이라면 가능한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한다. 기독교 문화는 어차피 세상의 문화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꾸며낸 이야기4- 기독교 영성을 따로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건, 책을 읽건, 어떤 문화생활을 하던 일단 기독교적 안경으로 비판을 하고 생각한 뒤에(주로 소문을 듣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아예 기독교 모델을 따로 만들어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담배 안 피고 술 안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표지가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정말 한국에 뿌리내리고 있는 기독교는 교회에서 가르치고 보여주는 개인적 신앙이 바르게 되기만 한다면 소망이 있는 것일까? 혹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후자의 의견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부흥신드롬 현상은 자명한 결론만을 갖게 된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고쳐지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우째 이런 일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 중에 일순위가 누구일까? 바로 김영삼 전대통령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떡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가는데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김씨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난무하는 현상을 보면서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이 국가적 위기가 김영삼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 영적 무능력함 때문에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김영삼씨 뭐가 그리 문제였을까? 개인적으로 보자면 젊어서부터 정치권에 뛰어 들었고 학벌도 그리 뒤지는 것도 아니고 민주화 운동에 한 역할을 해냈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옮겨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윤리적으로는 청렴결백하기로 소문(?)이 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갑자기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혹은 내가 비난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가 낳은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아닌가. 윤리적으로 보자면 그리 흠잡을 것도 없고 소위 말하는 교회생활도 나름대로 하면서 신앙을 지키려 하지만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는 ‘뱀처럼 지혜로운’사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듯이 사회에서는 사회의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 기독교는 단지 ‘일종의 종교’라는 믿음.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주먹구구식 신앙. 결국 김영삼 전 대통령이야말로 나의(우리의) 모습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신문 사회면이나 뉴스에 나오는 굵직한 사건들이 스쳐지나 갔다. 기독교 인구가 많다는 것이 이런 사건에 연루되는 기독교인 수가 많다는 안타까운 해석을 피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우리는 기독교를 이 나라의 제일종교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을 영성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결국 현대 사회, 문화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무기력, 무감각,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기독신앙의 실재를 잃어버린 영성에 있다.
이 문제를 접근하는 데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신앙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은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옛날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해답도 이미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진짜 문제는 왜 그 뻔한 해답이 먹혀들어 가지 않는냐는데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듣고 배워 온 대로 교회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가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하며, 전도와 십일조를 잘 하면 뭔가 변화가 올 것이라는 식의 대안은 식상함 자체를 넘어 두리뭉실 넘어갈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서구에서도 이러한 영성의 불일치 문제는 심각한 반성을 일으켰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상황에 시대마다 여러가지 대안들이 실험되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물론 표면적으로, 현상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적으로 현상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실패한 종교가 있었는지 의심해 볼만하다. 불교, 유교, 도교 등 그 어떤 종교라도 일단 들어 오기만 하면 급속히 확산된다. 그러나 나중에는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있는 종교로 변질된다. 좋게 말하면 종교의 토착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 종교의 핵심이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바꾸지 못하고 도리어 사람들의 정신구조가 종교의 핵심적 사상이 타협시킨 모습으로 표피화되는 것이다. 아 위대한 한국인들이여.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기독교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는 기분 나쁜 가정을 해보았다. 종교의 본질이 뒤틀어지는 현상은 물론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나라의 기독교도 영성에 대한 대안은 서구적인 신학적 해석의 틀로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3.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싹이 나오기 시작했을까? 한국 기독교의 110여년 되는 역사를 대충 돌이켜 보면서 그 단서를 찾아보자. 먼저,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으로 파송한 초창기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로 소개했다. 다시 말해서 교리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기독교(개신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변질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변화된 사람들이 근대화(학교, 병원, 남녀평등사상 등)에 앞장섰다.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개화기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기독지성인들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1운동이나 혹은 근대화에 앞장선 사람들 중에 자신들이 이해한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인 틀로 정리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1907년 평양의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 현상에 대한 문헌을 보면 대단한 부흥이었던 것 같다. 부흥회를 위해 학교나 상가가 쉴 정도여서 미국의 대각성운동도 무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점을 계기로 기독교는 급속하게 확산된다. 물론 일제시대라는 반동력적인 배경 때문에 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렇게 급격한 확산 속에서 한국 교회만의 독특한 영성의 틀이 하나 둘씩 모습을 잡아간다. 그 예로는 새벽기도나 통성기도, 혹은 부흥회나 사경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신사참배문제가 불거져 나와 그것이 나중에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천적인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의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을 특별한 성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충성하고자 했다.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에는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가 아니라 반 기독교국가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례적인 기독신앙을 낳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를 ‘우리를 압제하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를 압제하는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우는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자리잡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의 선구자,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귀의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본래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독립운동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다보니까 기독교인이 되는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이때까지 신앙의 선배들은 이론화 된 신학에 따라 저항하거나 투쟁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영적인 실체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 영성에 중요한 분수령은 바로 해방 이후에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해방이후 이데올로기 논쟁에 대처하지 못하여 분열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주변세력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후 공산주의의 활동에 대한 반공이데올로기로 편승하였다. 다시 말해 비기득권적인 식민상황에서는 사회, 정치적으로 개혁주도세력이었다가 기득권적 입장으로 위치가 잡히면서 정치적 입장을 배후에서 지지하는 세력으로 물러났던 것이다. 나는 여기가 한국 기독교 영성의 분수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신앙과 사회, 경제, 정치는 따로 분리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소위 신앙에만 몰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북쪽 기독교인들이 남하하면서 파생시켰던 외적 요인도 상당히 작용했지만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포기하고 교회 내부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여러가지 사회적 혼란과 함께 한국에는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60년대부터 급작스런 공업화로 말미암아 엄청난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한국 교회는 여기에 바탕하여 급격한 교회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 절정은 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부흥회 사이의 관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새마을 운동과 부흥회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아해 알 수도 있지만 이 당시 부흥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그 방향성을 보면 소위 말하는 '축복받는 신앙'에 대한 기초를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즉 정치와는 완전히 무관한 듯한 방향으로 선회한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 성장이 우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수적, 양적 성장만 할 수 있다면 거짓말과 착취를 해서 돈벌어도 괜찮다는 이데올로기가 암시적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교회 열심히 나오고 전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내면 그 사람의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게 되는 근대화의 우상적 신앙 형태를 낳았다. 삼풍백화점을 무너지게 한 그 장본이니 왜 교회의 중직이었겠는가. 기득권적인 위치로 서서히 입지를 굳히면서 교회 성장이라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우상의 이름을 '복음전파'‘영혼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리고 나서 한국 사회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다시 한번 변화를 겪게 되는데 천주교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개신교는 가장 늦게까지 보수대열에 남아 있었다. 그 당시 양심선언의 순서를 살펴보면 맨 나중에 입장을 표명한 개신교는 마지못해 개혁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준다. 즉 이미 기득권층이 되어 있었고 그들을 옹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놓여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부에서는 한국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80년대 말 기독교 인구수가 주춤하자 한편에서는 굳히기 작전의 일환으로 선교운동에 촛점이 맞춰진다. 이상하게도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외부로 방향이 돌려진다. 그리고 90년대 '세계화’논리에 맞추어져 해외선교의 붐이 일어나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함께 성령운동, 교회성장 운동, 문화운동으로 다시 새로운 유행을 타고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요점은 한국 교회의 영성이 사회 주도적인 위치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맞물려지는 현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개화기 이후에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평가는 영적, 현실적 주도권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뭔가 이루어 보려는 것이 우리 영성의 현주소이다.

4.현상에 대한 고찰

영성에 관하여 말할 때 한국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면 새벽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 기도원 운동, 설교중심의 예배, 성경에 대한 신성화, 부흥회, 사경회, 주일성수(?)의 논리, 십일조,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한국 교회의 성장을 보고 배우기 위하여 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한다. 우리가 이러한 현상들을 영성의 한 표출형태라고 본다면 여기에 관한 고찰도 필요하다.

그러면 먼저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 모토가 어떻게 옮겨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우리 주변에는 성경적이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많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가겠다는 표현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치는 곳은 많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교단, 교회, 목사의 논리를 얼마나 잘 뒷받침 해주는가에 이용당하고 있다. 그러면서 설교를 잘한다는 몇몇 교회에 교인들이 몰리면서 실제적인 부흥보다는 교인의 수평이동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교회처럼 말씀을 강조하는 나라에서 그렇게 좋은 설교를 많이 듣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말씀을 듣고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도 적은 것일까? 혹은 지난 주에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교인들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여기도 영성이 문제가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이 과연 제대로 들려지고 있는가? 교회 안에 설교는 많은데 성경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 홍수난 물에 마실 물 없다던 속담이 들어맞는 지점이다. 이렇게 되면 교인(소위 말하는 평신도)들은 점점 더 목사의 “말씀”에 의존적이 되어 버린다. 즉 어린아이들이 젖을 먹듯이 목사가 소화하고 적용한 말씀만을 듣는 타성에 젖어서 마치 목사님(혹은 어떤 영적 권위자라고 생각하든)의 신앙이 나의 신앙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스스로 성경을 상고해 볼 만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성경이 강조되는 곳에서 오히려 더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현상을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현상이 성경에 관한 교리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중심이라는 모토는 또 어떤가? 예배 공동체에서 이벤트 공동체로(그것도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나눔 공동체에서 모금공동체로(헌금과 십일조의 사용의 예), 선교 공동체에서 집회공동체로(전화해서 무조건 다 나와야 한다), 성령 공동체에서 미신?(무조건 기도하면 된다)이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으로, 지성공동체에서 무지가 덕인 사회로(지성과 지식인에 대한 불신)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자리이동을 하고 있다.
기도는 또 어떠한가? 사실 기도에 관하여 논의하려면 신학전반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할만큼 기도는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기도 많이 하는 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다른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에서 하는 것처럼 통성기도를 하지 않는다. 새벽기도나 기도원 등은 더 말할 나위없다. 그런데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앙 서적은 기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도를 많이 안 한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기도에 대해서 뭔가 틀이 잡혀있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교제로서 기도의 위치가 강조되기보다는 사역의 외형적인 활동을 위해서 기도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개인적인 교제로서 기도보다는 얼마나 많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 하는 공개적, 양적 기도생활에 치중해 가기 때문에 기도는 많이 하는 것 같지만 더 공허해 지고 결국에는 기도와 삶이 분리되는 문제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도를 강조한 반작용으로 지성의 우선 순위를 무시했다. 기독교 신앙에서 우선 순위는 지성이다. 또한 마음 역시 최우선 순위에 있다. 중요성의 우선 순위에 있어서는 물론 마음이 먼저다. 하나님을 만나 마음이 새로와 지지 않는 이상 지성적으로 아무리 잘 이해해도 하나님 나라를 잃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순서적인 측면에서 지성이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도 존재할 수 없다. 한국 교회와 신학은 지금 전쟁터를 잘못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 없다는 말이 기도와 사상이 없다는 말이요 기도와 사상이 없다는 말은 신학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사상적 전제와는 싸움을 포기하고 종교적 전제만 가지고 씨름을 하려 한다. 그 결과 주관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무기력하고 감상적 신앙을 키운다. 정치, 경제, 입법 등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이해나 실천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라면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 다투어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앙을 더 강조하는 영성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누가 뭐래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한국 기독교 영성의 현주소는 개인적 윤리는 좀 나을지 모르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실제적 영성이 없는 껍데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껍데기라는 말보다는 영성의 실체는 있는 것 같으나 벗지 못한 틀 위에 서있는 기독교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면 그 벗어 던지지 못한 틀은 무엇인가? 나는 이 점에서 우리 교회와 교단과 신학교를(심지어 선교단체까지도) 정직하게 바라보라고 요청하고 싶다.
소위 보수주의에서 외치는 교회 중심, 교단 중심, 목회자 중심이라는 말은 오늘날 의심을 사고 있다. 그도 그럴법한 이유는 교회야말로 권위주의, 당파주의, 지역, 인맥 파벌중심 등 파행적 유교의 찌꺼기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야말로 이러한 틀을 벗어 던지지 않으려 한다. 근대화에서 개혁을 주도하던 세력이 이제는 가장 개혁하기 힘든 세력으로 뒤바뀌었다. 또한 의도적, 비의도적이든 기득권층도 아니면서 기득권 층을 옹호하는 보수세력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정치, 사회, 경제 개혁의 현상이 있어도 교회는 항상 예외였다.
이 와중에서 한국 교회는 신앙을 말한다. 그런데 그 신앙이란 다름 아닌 진리의 전쟁터에서 후퇴하여 신앙 자체에 몰두하는 염세주의를 탈출구로 삼으라는 멧시지이다. 나는 이것을 복지부동, 신수도원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국회의원중 약 3분의1이 기독교인이라면 이 나라의 지도층에는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통계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도 정치는 정치하는 식으로 돌아가고 경제는 경제하는 식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신앙은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겨우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염세주의적 영성이다. 이것은 불교 산 속에 들어가서 하고 있는 역할과도 비슷하다. 다만 교회는 좀 더 많고 도시로 나와있다는 점만 다를 뿐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영적인 부흥과 물질적 축복은 항상 등식관계여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아무리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외쳐대도 이러한 판단은 피할 수 없다. 세계최대의 교회를 자랑하는 모교회야 말로 한국인의 기복신앙 정서에 딱 들어맞는 영성을 전파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 교회는 커졌고 그 여파로 이제 축복에 대한 교리는 어느 교회를 가건 들을 수 있지만 그 축복의 내용을 보면 무속적 틀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입시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 사업도 번창해서 헌금도 많이 하고 좋은 일에 쓴다는데 무엇이 기복적이라는 말인가? 내세에 대한 신앙으로 현재 고통을 극복하기보다는 내세를 팔아서라도 현재의 복을 누리겠다는 것이 기복의 핵심이 아닌가. 혹은 이러한 복(?)을 신앙 수준의 잣대로 이용하는 관행이야말로 뿌리깊은 기복적 영성이다. 사실 기독교는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을 약속하고 있다. 기복신앙은 축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희석시킨 결과이다.
세속적 틀은 분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교회성장 운동을 들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현재 교회 성장병을 알고있다. 교회성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그 자체로 합당하고 옮은 것이며 바람직하다는 전제를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정말 교회성장은 그 자체로 선한가?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신학보다 경영학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유행성 이벤트 사업체가 된 느낌이다. 숫자가 많고 재정 풍부한 교회가 바른 신학의 결과인 바른 교회처럼 인정되고 소위 말하는 큰 교회의 목사님 설교가 강해설교의 모델이 되며 큰 교회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금방 따라 갈 수 있는 순발력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로 여겨진다. 영혼대신 숫자에 더 관심이 많고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큰 교회건물을 갖는 것이 성장의 내용이라면 우리는 그 동기를 의심해야 한다. 근대화(모더니티의 문제)에 대한 신봉, 발전과 부흥의 논리가 언제까지 먹혀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서구 기독교의 유행만 좇아 다니다가 정작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을 놓치게 되면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부흥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근대화가 만들어낸 일 중심적, 결과 중심적, 실용적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심적, 관계 중심적 기독교의 적이 되고 있다. 또한 한국 기독교가 근대화과정을 통과하면서 세속적, 사대주의적 영성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한국 기독교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심지어 종교적 이슈에 대해서조차 뒷북이나 치고 핵심을 놓치는 현상이 거듭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핵심을 놓치면 놓칠 수록 서구의 거품 유행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시도가 많아진다. 영성과 신학의 틀이 잡히기도 전에 한국의 기독교는 서구신학의 세례를 받고 있다.
결국 현상적으로 보자면 한국 기독교의 영성은 불교, 유교, 도교와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즉 한국 사람의 정신구조를 개혁시키기 보다는 한국 사람의 정신구조에 동화되어 불교, 유교적, 무속적 정신구조 위에 서구의 세속적 신학의 껍데기를 쓰고 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영성의 현주소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이야기일까?

5. 맺음말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을 영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영성을 형성하는 세 가지 영역에서 문제점과 해결책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한국인의 사상적 틀로 기독교를 이해하거나 체계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창기 기독교가 들어 온 뒤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중요한 시기에 시작되었어야 할 일인데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함석헌 옹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짚으려는 것은 영성의 실체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이해하려는 신학적 시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사회 개혁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주원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서구 신학의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예를 두 가지만 들면 삼위일체와 인격성의 개념이다. 삼위일체는 서구 기독교가 발견해낸 멋진 보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모든 교리 중에 핵심을 차지한다고 나도 굳게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교리는 기독교 신앙이 헬라사상과 만나면서 헬라적인 이해와 부딪히면서 확인된 진리라는 점이다. 어거스틴은 아리안주의자에 대항하여 삼위일체를 논쟁한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였는데, 그 당시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실체라고 논쟁했던 사람들이었다.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성부하나님은 태생이 없으시다. 성자하나님은 태어나셨다. 두 분은 각각 뚜렷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와 다른 실체를 지닌다.”라고 했다. 어거스틴은 이에 맞서 관계는 실체를 초월한다고 논쟁했고 그러므로 성부하나님은 그의 모든 실체를 성자하나님과 관계하며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신적인격은 하나이며 동시에 그 본체는 동일한 실제로서 절대이며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지향하도록 되어 있는 실제라고 한다. 소위 말하는 플라톤적 이원론에 대한 배경 때문에 논쟁이 불거저 나왔던 것이다. 서구신학이 지칭하는 인격의 교리는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사상과 충돌하면서 확인된 진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진리가 한국에는 어떻게 소개되었는가? 지금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질료와 형상같은 개념 대신에 다른 이해의 틀이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 전혀 문제가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서의 촛점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문제제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구신학과 같은 문제제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혹은 더 나아가 인격의 개념은 어떠한가? 성경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인격의 개념을 서구에서 발견하여(적용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인권과 법에 대한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어떻게 보면 성경적 뿌리를 갖고 있다. 서구는 수백년의 기독교적 문화 속에서 비판이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God’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정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하나님’에 대하여 그러한 상황이 아닌데 무조건 기독교적 진리를 논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권위주의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기독교의 진리가 표피화 되고 내용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는 일이다. 십자가의 중심성(특히 구미 신학)은 상징성으로 표면화 표피화된다. 즉 십자가의 내용보다 십자가가 기독교적인 것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남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 보혈의 능력? 이런 말들은 주술적, 미신적 암시가 섞인 용어로 전락하거나 만병통치약(기도하면 다 된다는 식의)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실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맨날 성경과 성령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판에 박힌 결론밖에는 안나오는 것이다.
결국 영성은 신학과 연관이 된다. 한국 교회는 서구 기독교와는 다른 지적 배경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맞게 되는 문제들은 서구의 기독교가 당면한 난제들과 동일하지도 않으며 문제 해결방법도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신학이 한국인의 사고 이해의 틀로 재정리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인만의 사상과 사고이해의 틀이 있다. 그런 틀을 사용해서 신학이 들어오고 전달되어야 하는데, 너무 관념적이거나 분석적인 서구신학 쪽으로 치우쳐 결국 영성따로 신학따로 가는 이상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영성과 신학은 분리시킬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계시에 있어서 인격적이고 의사소통하시는 분이라면 성경적 증거와 하나님의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통하여 신학적이고 철학적으로 당당한 틀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이다. 즉 서구 신학을 따라 학문적인 논쟁이나 추상적인 묘사로 가고 있는 한국신학은 그 결과에 대한 댓가를 치르기 전에 틀을 잡아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맥도날드식 교회성장학보다는 다른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근대화에 맹목적으로 편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서구에서는 근대화의 뿌리조차 기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난 근대화 과정은 그러한 뿌리나 배경이 없이 선진국가라는 이데올로기적 방향아래 근대화의 결과만을 쫒아 다녔는데 이것을 비판해 줄 기독 지성인도 없었고 또한 비판할 만한 뿌리고 갖고 있지 못했다. 그 결과로 미국 신학이나 종교적 현상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낳은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의 이념을 빼고 근대화만 배운 결과이다. 물론 근대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정치 경제적 환경이다. 그러나 근대화가 갖고 있는 양면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진짜 주도권을 세속주의에 넘겨주고 난 뒤 교회성장운동이라는 표어속에 교회가 성장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끌고 가는 우상이 될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성장이 아니다. 오스 기니스의 말대로 근대화라는 괴물과 식사를 하려면 긴 숟가락을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힐 것이다.

세번째로 실천적 영성에 있어서 한국인의 전형적인 정신구조를 이겨내거나 소화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현상적으로 기독교의 상황화가 위험수위에 처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으며 주관주의적 신앙 형태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아직 유교적, 불교적, 무속적, 세속적 틀을 벗지 못했다. 오히려 그 위에 안주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배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한의 문화라고 생각된다. 종교가 한의 문화 위에 세워지면 종교는 한의 배출구 역할만 하게 된다. 한을 즐기는 문화로서 우리나라는 그것을 덮어두는 문화가 아니라 표출구를 찾게 마련인데 유교나 불교도 이러한 쓴뿌리의 문화를 뿌리뽑지 못했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실제적인 문제인데도 가장 덜 다루어지는 영역이다. (모든 인간관계-부모자식, 고부간, 형제, 상사와 직원, 교역자와 평신도, 지역감정, 학벌) 또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영역을 관찰해 보면 그 현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비교적 대응하기 쉬운 문화적 부분에만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주되심을 드러내야 할 부분(정치, 경제, 사회 등)은 제껴두고 접근하기 쉬운 문화 혹은 상담, 자녀교육, 문화사역 등에 놀랍게도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

한국 기독교에 영성의 현주소를 파악하려다 보면 과연 영성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가하는 의문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직 주변에는 참된 영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실천적인 영성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가 대안으로 개발할만한 잠재력이 있는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인듯 하다.

이점은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부분이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인도해주시는 감성대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역시 성경이 말하는 영성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감성적인 부분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가 계발할 여지가 많다. 서구 신학이 이성적이고 분석인 면에서 강하지만 감성적인 측면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앙에 있어서 감성의 영역도 충분히 조직적으로 보편화 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의 영성은 그러므로 구속적이고 통합적인 방식으로 인간 존재 전체의 신비를 드러낸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측면 속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에 대하여 열려진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그 결과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의 위대한 사상의 정점에서뿐만 아니라 감성의 깊은 곳에서도 느껴지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기 감정에 대한 많은 두려움과 무지속에서 살고 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생애에 중심을 차지한 열정(Affectus)은 하나님을 향한 지성, 의지, 열망, 사랑과 동의어이기도 하며 지속적인 성향, 기질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우리가 신적인 진리에 대하여 은혜로운 열망으로 반응하는 깊이만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하여 더 확실하게 증거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진리들에 걸맞는 열망을 계발시켜서 그것이 진실한 복음증거로 옷 입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나는 이 일이 우리가 갖고 있는 영성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한국의 기독교 영성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체 지향적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본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 삶은 공동체적 삶이며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방식의 삶으로 나눌 수 있고 또 나누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엘리트적 우월 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평신도이건 전임 사역자이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성도의 교제속에 살도록 심오한 추진력을 준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영적 운동의 풍부한 유산을 깊이 깨닫게 하며 교회의 기초적 차원에서의 삶에 대하여 알게 하는데, 이는 교회사와 관련하여 개혁적 인식론을 요구한다. 오늘날 공동체적 삶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은 단지 공동체 프로젝트나, 지도자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서구의 극단적 개인주의에 질릴 정도가 되야 깨닫게 되리라고 본다. 나는 이런 작업이 우리가 벗어던지지 못했던 유교적, 무속적, 세속적 틀을 적극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그리 확산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필요는 우리가 사역과 동기 가운데 개인주의적으로 남아 있으려는 한 우리의 인격성이 메마르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때 발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인격으로서, 인생이 궁극적으로나 직접적으로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깨어지고 소외된 사회에 우리는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듣는 것, 각각의 인격이 지닌 독특성 위에 이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 그리스도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는 것, 자신의 손만을 부여잡고 있지 않는 것 등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 대항하여 서는 데 있어 급진적으로 대조적인 몇몇 방법들이다. 나는 삼위일체적인 이런 영성을 ‘우리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함께 살고 나누는 법을 위한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도 바울의 기도야말로 우리가 이 세대에 목표로 삼아야할 영성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2007-11-24 18: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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